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려 하고,
산은 세속을 여의치 않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신라 중기까지도 봉우리가 아홉개라 하여 구봉산이라 불리던 산이 신라말기에 속리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설 중의 하나가 위의 고운의 싯귀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속세를 떠난다는 의미의 “속리산”이 되려면 “離俗山”이라야 맞는 것이고 “俗離山”의 원래 의미는 “속세가 산을 떠나려 한다”는 뜻이 된다. 산과 관련된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나는데, 俗과 仙을 破字하여 글자가 만들어진 의미를 음미한다면, 사람이 골짜기에 머물러 있으면 俗이요 사람이 산에 들면 仙이라는 것이었다. 고운의 싯귀와 破字풀이를 양손에 들고 보면 실로 禪문답의 화두가 될 법도 하다.

속리산 문장대는 흔히 법주사 쪽에서 오르는 길에 많이 몰리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편인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에서 오르는 코스를 택하였다. 오르는 길 내내 느꼈던 바, 이 코스야말로 문장대를 오르는 최상의 코스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문장대로 오르는 가장 짧은 코스라는 것이 최대의 장점이다. 한대장의 설명 그대로 90여분만에 정상에 오를 수 있어서 전체적으로 북한산의 중간의 한 봉우리를 올라가는 정도였다.

다리가 뻐근해지는 급경사의 된비알(매우 험한 비탈 : 야후 국어사전)과 평탄한 산책길이 번갈아 나타나므로 지루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힘들지도 않게 정상정복의 쾌감을 맛볼 수 있었다. 오르막길은 거의가 돌계단이 쌓여 있었는데, 이 곳의 돌계단은 북한산이나 도봉산의 돌계단이 지나치게 인위적 규격으로 우왁스럽게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아담한 작은 크기의 돌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여 쌓았기 때문에 원래의 자연의 한 부분인 양 눈에 전혀 거슬림이 없이 오히려 우리나라 정원양식의 한 형태를 보는 것 같아 즐거웠다. 이렇게 자연친화적인 돌계단을 만드느라 신경쓴 속리산국립공원 당국자에게 칭찬을 드리고 싶다.

또 빼놓을 수 없는 코스특성중의 하나가 8부 능선인 해발 850 미터 지점까지도 시냇물이 줄곧 함께 따라와 준다는 점이다. 지금은 겨울이라 얼음장 밑으로 졸졸 흐르고 있지만 한 여름에 이 코스로 오른다면 물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겠다.

해발 1054 미터의 문장대는 하늘위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덩어리이다. 급경사의 철계단 난간 좌우로는 천애의 낭떠러지이다. 필자는 고소공포증이 있기로 후둘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진정시키면서 바위의 정상에 서니 경상북도 상주시와 충청북도 보은군의 수 백개 봉우리가 마치 이 바위를 경모하여 절을 드리는 듯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세조임금의 한 번의 방문으로 해서 문장대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설명이 있거니와 오히려 그 이전의 雲藏臺라는 옛이름이야말로 이 우람한 봉우리의 위엄을 훨씬 적절하게 표현하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문장대 바위 바로 아래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휴게소식당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한 옆에는 통신탑이 흉물스럽게 버티고 있다. 과학기술이 더 발달하여 이런 대규모 통신탑이 필요없이도 첨단의 통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어쨌거나, 우리 일행은 식당에 들어가 시래기된장국과 잔치국수로 허기진 속을 달래었다. 물론 일부의 애주가들은 입에 짝짝 붙는 동동주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대장의 “깍꿍”소리에 킬킬거려 가며 전체사진이다 그룹사진이다 해서 한참을 사진찍기에 부산을 떨고 나서, 문장대를 뒤로 하고 신선대 방향 주능선을 탔다.

상주쪽에서 문장대에 올라 주능선을 타지 않고 바로 법주사로 내려간다면 그 것은 속리산의 진짜 절경을 절반밖에 못보고 오는 것이 된다. 문장대에서 신선대까지의 30분 능선길은 좌우로 산아래의 속세를 내려다보는 맛도 기막히거니와, 때로는 아기자기하고 때로는 웅장한 속리산의 바위들을 넘나들며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이런 산길에서는 반드시 적당한 지점에 멈춰서서 뒤로 남겨진 경치를 감상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지나온 길이 이렇게 멋있는 경치의 한 부분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선대에도 규모가 좀 작은 휴게소가 있었다. 참새들이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치랴. 일행은 또다시 주저앉아 전부침개에 당귀동동주를 시켜 너도나도 한두사발씩 걸친다. 좋은 경치에 좋은 친구들에 동동주는 목구멍에서 잡아당기듯 꿀떡꿀떡 넘어가니 모두가 희희낙낙 그야말로 “離俗”하여 “道樂”을 얻은 듯 유유자적하였다. 이 날의 산행의 키워드는 단연코 “휴게소”! 신선대에서 약 40여분을 내려가니 또 다른 휴게소, 거기에서 10여분 거리에 또 휴게소 하나! 속리산이 결코 “俗離”가 아니라 휴게소로 가득찬 유원지로 변한 느낌이다. 우리 같은 산꾼들이 이것을 반겨야 하나 아니면 마땅찮게 여겨야 하나.

신선대에서 법주사 옆까지의 하산길은 2시간이 넘게 걸리는 아주 긴 하산길이었다. 처음에는 45도 경사의 급한 내리막이지만 후반부는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길이다. 세심정에서부터는 차량이 교행할 수 있는 차도이다. 따라서 이 코스로 해서 신선대로 오른다는 것은 매우 지루한 어프로치일 수 밖에 없다.

법주사 입구 주차장에 일행이 다 내려온 시간이 4시 20분 경. 휴식과 식사, 그리고 막걸리 파티까지 포함해서 6시간에서 조금 모자라는 시간의 산행이었다. 저녁식사는 정이품송식당에서 버섯전골에 쇠주와 백세주를 곁들였다. 특이하게도 이 식당의 전골에는 천연송이가 몇 점씩 들어있어서 그 향기가 음식전체에 그윽하게 배어있다. 칼로리도 거의 없어서 살찔 염려도 없으니 건강식으로도 그만이다.

좋은 산행에 좋은 음식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된 상쾌한 하루였다. 필자가 양재역에 내린 시각이 9시 10분. 원정산행으로는 이례적으로 이른 시각이었다. 너무 이른 시각이었기에 혹시 2차의 유혹은 없었나요?

연말 모임에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 참석해 주세요.

<정 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