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이름난 산마다에는 독자적인 자랑거리가 되는 주제어가 있다. 그 것이 소백산에서는 주목과 설화, 그리고 5월의 철쭉이다.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에 (지금은 영주군 풍기읍이지만 당시에는 풍기군이었다.) 소백산 탐승기인 ‘소백산록’을 남겼는데, 거기에서 ‘석름(石凜), 자개(紫蓋), 국망(國望) 세 봉우리간의 거리가 서로 8,9,리쯤 되는 사이에 철쭉이 숲을 이루었으며, 마침 그 꽃들이 한창 피어나서 울긋불긋한 것이 꼭 비단장막 속을 거니는 것 같고 호사스런 잔치 자리에 왕림한 기분’이라 적었던 소백산의 철쭉을 보러 가는 산행이다. 어찌 기대와 설래임이 없을 것인가. 그러고 보면 450 년전에도, 아니 그 이전의 수 만년 전에도 소백의 주능선은 그렇게 철쭉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었던 모양이다.

더구나 이틀 전에 내린 비로 공기중의 먼지들을 모두 씻어낸 덕분에 서울의 대기가 금년들어 가장 맑았다는 TV 보도도 있었고 하여 더욱 더 기대가 되는 일요일 아침이다. 여니 때와는 달리 중간휴식을 갖고 휴게소를 출발하고 나서야 한대장이 오늘의 산행코스를 안내하였다. 풍기에서 비로봉까지의 오름길은 수월하겠지만 주능선에서 어의계곡으로 통하는 하산길은 다소 험할 것이라는 주의가 있었다. 한대장이 이렇게 미리 침을 놓는 것으로 보아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버스가 중앙고속도로를 벗어나 단양군의 경내에 드니 국망봉에서부터 연화봉까지의 소백산 주능선이 거대한 놀처럼 둘러서서 평지를 굽어보고 있다. 우리나라 산중에 ‘白山’ 이라는 이름을 지닌 여러 산들은 산이 높고 그 지역에서 중요한 산으로 신앙될 때에 이같은 이름으로 불리었다. 태백산, 장백산, 문수백산, 소백산 등이 그러하다. ‘백(白)’은 ‘희다’ ‘밝다’ ‘높다’ ‘거룩하다’ 등을 뜻하는 ‘밝'(아래아) 에서 유래한 것이다. 과연 평지에서 올려다 보이는 소백의 주능선과 봉우리들은 바라 보는 이로 하여금 거대한 자연에 대한 외경과 함께 어머니 대지의 푸근한 가슴을 느끼게 한다. 소백산릉의 이러한 굴곡미를 바라보면 여체의 풍만함을 연상하게 된다.

산행의 시작지점인 풍기읍 삼가리 매표소 주차장에는 산악회 버스가 이미 20여대가 넘게 주차하여 있다. 한대장이 버스에서 말했듯이 오늘 수십개의 산악회가 소백산의 여러 진입소에 도착하고 있을 터였다. 주차장에서 비로사까지의 1.8 km 는 탄탄하게 콩크리트 포장이 된 차도이다. 산을 오르는 남녀노소의 인파에서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단연 우세를 보이고 있다. 완만한 경사이지만 워낙 해가 쨍쨍한 더운 날씨이어서 벌써 등덜미가 땀에 젖어든다. 이런 와중에 주변머리 좋은 일부 대원들은 지나던 봉고에 편승하여 1.8 킬로를 무노동으로 등산하는 수완을 보였다. 비로사 입구까지는 철철 넘치는 계류가 계속 옆을 따라 흐른다.

비로사입구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니 죽계구곡 쪽에서 오르는 등산로와 만나는 달밭재 삼거리에서 길은 왼쪽으로 틀어서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입심좋은 경상도 아지매들의 재잘거림에 싸여서 정신없이 오르고 또 오른다. 주말마다 다니던 북한이나 도봉의 암산과는 달리 육산의 전형인 소백산은 오르내림이 없이 줄곧 완만한 오름의 연속이다. 비로사 입구에서 비로봉 정상까지는 3.7 킬로미터의 결코 짧지 않은 오름길이다. 함께 오르는 임윤재 대원의 말로는 능선보다 아래 위치에 새로운 등산로를 만들기전의 예전의 능선 등산로는 좌우로 비로봉과 국망봉과 바라보는 눈이 확 트이는 전망좋은 등산로였다고 한다. 등산인구의 증가로 인한 토사의 유출을 막기 위한  공원관리공단의 조처였겠지만 우리 같은 산악인으로서는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로봉까지 0.8 킬로라는 표시판이 보인다. 시선을 올려 보니 저 만큼 비로봉 정상이,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 싼 사람들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그런데, 표고차 900 미터를 오르느라 이미 기진맥진한 필자에게는 그 마지막 800 미터가 10리도 더 되는 것 같은 엄청나게 힘든 길이었다. 나무계단으로 된 마지막 피치를 다리가 천근인 양 끌고 오르니 드디어 비로봉 정상이다.

지난 3월에 왔을 때 눈으로 덮인 순백의 구릉을 보여주었던 소백의 산상벌판이 이 번에는 초록색의 정원을 연출하고 있었다. 수 만평도 더될 초원의 구릉에 울긋불긋 있는 것은 모두 사람들의 무리이다. 언뜻 눈에 보이는 숫자만 해도 수 천명은 되겠다. 다만 우리가 그토록 기대했던 철쭉은 이미 끝물을 지난 상태라서 어쩌다 눈에 띌 정도이다. 이만저만한 실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축구장보다도 더 넓게 좌우로 펼쳐진 푸르른 산상의 초원구릉은 저절로 찬탄이 튀어나오게 한다. 그 어떤 어휘로 소백의 주능선을 표현할 수 있을까. 부드럽다. 풍요롭다. 풍만하다. 육중하다. 푸근하다. 포실하다. 장엄하다. 시원하다. 아마도 이 모든 형용사가 합쳐진 새로운 어휘가 있어야만 소백능선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로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은 곳이다.

국망봉 쪽 능선을 조금 가다가 어의곡리로 갈라지는 삼거리 너른 터에 자리잡고 점심을 들었다. 산꼭대기에서 먹는 음식이란 세상에서 가장 맛이 있는 법인데다가 저마다 푸짐하게 음식을 준비해서 모두들 푸짐히 먹고도 남을 정도이다.

하산길은 국망봉으로 가다가 중간에서 작은 길입구를 찾아 산의 사면을 타고 내려가는 길이다. 이 길은 다른 산행꾼은 전혀 없이 우리 기산회가 독차지한 길이다. 계곡물을 만날 때까지 한 시간 정도의 하산길은 울창한 원시림, 말 그대로 정글이나 다름없다. 발 아래에는 다른 야산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야생초들이 무성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결과, 과연 소백산에는 에델바이스와 주목을 비롯한 1,067 종의 식물종이 서식하는 자연 그대로의 식물보고라 한다.

계류가 나타나면서 하산길은 길이랄 것도 없이 계류의 바위와 돌무더기를 타넘고 건너뛰는 험로이다. 바위 위는 돌이끼가 퍼렇게 덮여 있고 바로 옆으로는 콸콸 흐르는 계곡물이니 한 걸음 한 걸음이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하산길이 생각보다 훨씬 느리다. 다섯시를 넘기고서야 마을로 내려올 수 있었다. 모두 여섯 시간이 넘은 긴 산행이었다. 내년에는 소백산의 주능선을 오랜 시간 걸을 수 있는 코스를 기대해 본다.

<정 해진>